2016년 9월 1일, 시범경기가 열리기 전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San Francisco 49ers)의 쿼터백 콜린 캐퍼닉은 인종차별과 경찰 폭력 문제를 환기시키기 위해 미국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무릎을 꿇었다. 이 행동은 이후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 외에도 미국 운동선수들은 수십 년 동안 운동경기 현장을 저항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다음은 그러한 사례들이다.
애국가가 울릴 때 기립을 거부한 마흐무드 압둘 라프(1995년)
1995-1996 NBA 시즌 동안 덴버 너기츠(Denver Nuggets)의 한 스타플레이어가 국가가 울릴 때 기립하는 것은 무슬림 신앙에 위배된다며, 이를 거부했다. 마흐무드 압둘 라프는 기자들에게 미국 국기는 “압제와 폭정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NBA는 압둘 라프에게 한 경기 출장 금지 처분을 내리고, 앞으로는 애국가가 연주될 동안 선 채로 기도를 해도 좋다는 합의를 유도해냈다. 그러나 압둘 라프는 그의 태도에 따른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그의 소속팀 덴버 너기츠는 시즌이 끝난 후 그를 새크라멘토에 트레이드했고, 그는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29살의 나이로 NBA에서 퇴출되었다.
켄터키 주에서 열리는 시범경기를 보이콧한 보스턴 셀틱스(Boston Celtics)의 빌 러셀과 4명의 흑인 선수들(1961년)
보스턴 셀틱스(Boston Celtics)의 빌 러셀과 4명의 흑인 선수들이 켄터키 주 렉싱턴의 한 식당에서 서비스를 받지 못하자 그는 코치 레드 아워백에게 이 도시에서 열리는 시범경기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보스턴 셀틱스의 상대팀이던 애틀랜타 호크스(St. Louis Hawks) 소속 두 명의 선수들도 빌 러셀 일행의 움직임에 동참해서 경기를 보이콧했다.
하지만 코치 레드 아워백은 흑인 선수들 편만을 들지는 않았다. 그는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흑인 청년들이 너무 감정에 치우쳤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우리는 두 시간이나 설득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러셀과 동료들은 보스턴으로 돌아왔고, 러셀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흑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습니다. 이는 변화하는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는 싸움입니다. 저는 그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하루 뒤 셀틱스의 구단주 월터 A. 브라운은 <보스턴 글로브>지와 인터뷰를 갖고 “나는 내 운동선수들을 힘들게 하면서까지 경기를 할 정도로 돈에 굶주린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 당시 미국 프로 농구 리그는 9개 팀으로 구성되었었다.
운동선수들의 보이콧으로 올스타경기를 옮길 수밖에 없었던 AFL(1965년)
1965년, 뉴올리언스에서 개최하기로 했던 올스타경기가 흑인 선수들에게는 악몽으로 변했다. 택시들은 흑인 선수들을 태워주지 않았고, 버번스트리트의 나이트클럽들은 흑백을 차별했으며, 한 경비원은 어니 래드 선수에게 권총을 들이대기도 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선수들은 올스타경기를 거부했다. 이와 관련해 뉴올리언스의 시장 빅터 H. 시로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 저항 운동이 “자신들이 철폐하고자 하는 바로 그 조건을 때맞춰 악화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AFL의 커미셔너 조 포스는 선수들의 행동을 나무라지 않고, 올스타경기장을 휴스턴으로 재빨리 옮겨버렸다. 이 저항운동은 뉴올리언스의 흑백차별 폐지 운동에 불을 당겼다. 대형 스포츠 이벤트의 개최 기회를 놓침으로 영업에 막대한 손실을 입은 상점 주인들이 들고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징집을 거부한 무함마드 알리(1967년)
미국 육군이 무함마드 알리가 징집 대상이라고 발표하자 알리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베트남 전쟁이 자신의 무슬림 신앙에 배척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베트콩과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1967년 4월 28일, 알리는 육군 징집을 거부하면서 헤비급 챔피언 자격을 박탈당하고, 3년 동안 출전을 금지 당했다.
두 달 뒤 알리는 전원이 백인들로 구성된 배심원이 배치된 재판에서 병역기피 죄로 5년형을 언도받았다. 여론도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애틀랜타 컨스티튜션> 지는 “클레이가 병역기피 리그에 많은 동료들을 이끌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당시에는 그를 무함마드 알리라고 호칭하는 언론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알리에 대한 판결을 뒤집었다. 권투의 전설 알리는 1981년 권투 세계를 떠났다.
하계올림픽의 토미 스미스와 존 칼로스(1968년)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하계올림픽 200미터 육상에서 토미 스미스는 금메달을, 존 칼로스는 동메달을 땄지만 역사는 그들의 메달보다 시상대 위에서의 행동을 더 기억한다. 미국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두 선수는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들어올렸다. 그 행동은 당시 블랙파워를 나타내는 표시였다. 여기에다 은메달리스트였던 오스트레일리아의 피터 노만 선수까지 합세해서 세 선수 모두 인권을 상징하는 배지를 달고 있었다.
그러자 IOC의 에이브리 브런디지 위원장은 즉각 스미스와 칼로스를 출전 금지시켰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언론의 뭇매도 맞아야했다. 스카고의 스포츠 전문 기자 브렌트 머즈버거는 그들을 가리켜 “두 명의 돌격대원(storm troopers)”라고 부르기도 했다.
스미스와 칼로스는 이 올림픽에서 더 이상의 메달을 딸 수는 없었다. 수십 년이 흐른 뒤, 스미스는 시상대에서의 항의 표시는 인권을 지지하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말했다.
시위를 벌였다고 14명의 흑인 선수들을 출전 금지시킨 와이오밍(1969년)
와이오밍의 미식축구 팀은 무패 행진을 기록하고 부리검영대학교와의 경기에서는 12번째로 그 주의 최고 경기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 팀 소속 14명의 흑인선수들이 로이드 이튼 감독을 찾아가서, 모르몬교 측의 인종차별 정책에 항의하는 시위 계획을 상의하자 이튼 감독은 그들을 일축해버렸다.
14명의 흑인선수 중 한 명은 당시 이튼 감독이 “젊은이들, 시간과 정열을 아끼게나. 현재 자네들은 축국 경기에서 배제되었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일주일 뒤, 와이오밍 소속의 4명의 육상선수들이 이 미식축구 선수들에 동조하는 표시로 시합 출전을 포기했으며, 이 축구팀은 원정경기 때마다 항의 시위에 시달렸다. 이처럼 선수들을 대량으로 해고한 후 카우보이스(Cowboys)는 12승만을 기록했고, 로이든 이튼은 1970년 시즌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해임되었다. 2019년 대학 측은 이들 14명의 선수들에게 공식 사과를 했다.
남성과 동등한 상금을 요구한 빌리 진 킹(1970년)
1968년 테니스가 오픈 방식(Open Era)으로 치러진 이후부터 남자 선수들이 여자 선수들보다 상금을 더 많이 가져갔다. 그러자 빌리 진 킹은 1970년 토너먼트를 보이콧하고 싸우기로 했다. 우승상금으로 남자에게는 12,500달러가, 여자에게는 1500달러만이 책정되었기 때문이었다. 킹은 항의 표시의 일환으로, 미국 테니스협회의 출전금지 위협에도 불구하고, 라이벌 투어를 기획했다.
1970년 9월에 토너먼트 측은 킹과 동조자들의 보이콧을 피하기 위해 여성 우승자의 상금을 증액했다. 1973년 6월, 킹은 여자테니스연맹의 초대 총재가 되었다. 한 달 뒤 US 오픈 측은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상금을 받을 것이라고 공표했다.
시즌을 경기장 밖에서 보낸 시러큐스 선수들(1970년)
흑인 조교의 부족에 항의하고, 백인과 동등한 학문·의료 혜택을 요구하며 흑인 선수 9명이 봄 훈련을 거부했다. 이에 맞서 시러큐스 측도 남부 도시들에서 열리는 원정시합에 흑인 선수들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백인 동료 선수들도 이들 흑인 선수들이 복귀하면 운동을 그만두겠다고 위협했다. 라인배커(linebacker)였던 빌 코그힐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저를 편협한 놈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나는 그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고 말했다.
결국 해당 흑인 선수들은 졸업을 하기는 했지만 시즌 내내 경기를 뛰지 못했고, 미식축구 선수로서의 경력에 손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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